
[ 칼 럼 ] 환경은 묵언의 스승이다.
우리는 주어진 환경에서 직간접경험을 하면서 성장한다.
변화하지 않으면 몰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며, 유기체처럼 우리 삶 속에 살아 움직이는 것이 민주주의다.
환경은 너와 나 우리가 만들어 간다.
땀을 흘리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는 말속에는 많은 뜻이 함유되어 있다.
자본주의가 도래된 이상 우리는 세상과 부딪히며 살아야 한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을 세 가지 행위로 함축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노동행위, 아이디어를 물질에 투여하는 작업행위, 타인과 소통하는 정치 행위다.
이것이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다. 어떤 환경에서 어떤 행위를 하느냐에 따라 개인의 삶과 질이 다르다.
아포리아에 직면한 국내외 정세를 생각할 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참민주주의에 대한 숙고의 시간을 한 번쯤은 가졌을 것이다.
변화의 행진이 민주주의라고 하지만, 현재는 역동을 넘어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21세기 한나 아렌트가 명명한 전체주의의 ‘악의 평범성’이 재조명되는 까닭은 뭘까?
선전과 선동, 페이크와 딥페이크로 이념 몰이가 난무하는 시대, 성숙한 국민 의식이 참으로 중요한 시기다. 어느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날 줄 모르는 현실은 우리를 벼랑 끝에 세워놓기도 한다.
물질과 자본과 이념으로 지배당하고 있는 21세기, 스스로 사유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짐승처럼 살거나 노예로 살 수밖에 없다.
혼란과 혼돈의 시대,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깨어나야 할 때다. 나는 믿는다.
인간은 사유하는 존재로 진화해 왔고 위대하다는 것을. 그러나 내가 행동하고 실천하는 행위가 공적이 아니라 사적이거나 특정 집단의 이익에 의해 움직인다면 이것은 참다운 민주주의 시민의 자세가 아니다. 공공성만이 우리를 파멸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
민주주의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말할 권리와 행동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
책임과 의무가 따르지 않는 말과 행동은 이 사회를 아주 불편하게 만든다.
가끔 책임지지 못할 말과 행동으로 우리를 아주 불편하게 하는 정치인과 이웃이 우리를 혼란에 빠트리기도 한다.
우리는 무능한 지도자와 정치인들 때문에 대한민국이 힘들다고 욕한다.
국정과 법안, 정책 등을 논의하는 국회 본회의장을 생중계하는 현장을 보면 대한민국 국민의 의식 수준을 알 수 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고 있을까 봐 낯이 뜨거워진다.
그 사람들의 수준이 국회로 보낸 대한민국 국민의 수준이다.
누가 누구를 욕한단 말인가?
갈 수 있다면 아테네 시민들이 서로 만나 민주주의 정치를 자유롭게 논의하던 공론장(폴리스)으로 들어가 보고 싶다.
국민이 주인이라고 부르짖는 대한민국 국민의 소리는 왜 국회 회의장이 아니라 광화문 등 거리로 나와야 하는가?
인간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을 때 가장 활동적이고, 혼자 있을 때 덜 외롭다고 한다.
자신을 돌아보며 성찰의 시간을 갖고 생각 좀 하고 살라는 뜻을 놀고먹으라는 의미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다.
사유의 중요성을 착각할 정도로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뒤돌아보자.
선전과 선동으로 사람의 영혼까지 하나로 결집하는 전체주의가 이 시대 주목받는 것은 왜일까?
모든 사람이 당연하게 여기고 평범하게 행하는 일이 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산다.
나는 죄가 없다.
“나는 악마도 괴물도 아니다.
나는 그렇게 만들어졌을 뿐이다, 나는 오류의 희생자다”라고 세뇌된 아이히만의 당당함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사유의 진정한 무능력 때문이라고 정의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토대로 우리도 선전 선동에 동요되지 않고 참민주주의 국민으로 거듭나기 위해 잠시 멈춰서 사유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